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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박제된 음표가 그의 손끝에 내려앉으면, 공기의 온도가 달라진다. 불과 5초, 10개의 음표. 속삭이듯 이어가는 음표와 음표 사이로 온기가 스몄다. 두 개의 다른 시간대가 음악에 쌓였다. 1808년 초연돼 2025년에 다시 연주되기까지의 197년, 1993년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빈필하모닉과 연주한 30대 청년 지메르만이 쌓아온 32년. 오선지 위에 박제된 검은 점에 불어넣은 숨결은 시간의 서사였다.
희귀한 장면이 만들어졌다. 지난 2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선 뉴욕필과 지휘자 에사페카 살로넨, 피아니스트 릴게임환수율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협연이 성사됐다. 뉴욕필은 11년 만이 내한이며, 지메르만이 미국 악단과 연주하는 것은 장장 16년만, 뉴욕필과의 협연은 1996년 이후 29년 만이다. 2009년 LA타임스의 왜곡된 기사로 지메르만이 조국 폴란드에 대한 미국의 군사 조치에 항의해 미국 공연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지면서다. 심지어 지메르만이 예술의전당 무대에 서는 것도 일진머티리얼즈 주식
2003년 6월 4일 공연 이후 처음이다.
지메르만과 뉴욕필의 협연이 성사된 것은 오랜 인연을 맺은 지휘자 살로넨 덕분이다. 공연기획사인 마스트미디어의 김용관 대표는 “뉴욕필과의 서울 협연을 제안하자 지메르만은 지휘자가 누구냐고 먼저 물었다”며 “살로넨이라고 답하자 꼭 하고 싶다는 답변을 들려줬다”고 했다. 두 사람이 서울에서 협연하는 것증권
은 2018년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이후 처음이다.
이날 예술의전당에서도 지메르만의 공연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공연 중은 물론 커튼콜에서 휴대폰 녹음, 사진 촬영을 엄격히 금지했다. 지메르만은 워낙 ‘완벽주의자 피아니스트’로 공연 중 소음이나 녹음에 대해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치킨을 사랑해 한국에이수화학 주식
서 리사이틀로 종종 만날 수 있으면서도 그가 예술의전당을 선택하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업계에 따르면 지메르만은 2003년 공연 시작 전 무대 위에 설치된 마이크를 보고 “허락하지 않은 녹음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단호한 입장을 보였다. 그 이후 지메르만은 예술의전당을 찾지 않았다.
이날 안내방송에선 “녹음, 녹화, 사진 촬영 등황금성게임장
은 향후 아티스트의 내한공연 추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공연기획사의 우려까지 반영된 멘트였다.
이번 만남에서 연주한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이다. 국내 최대 음원 플랫폼 멜론, 지난해 한국에 상륙한 애플 클래식에서 이 곡을 검색하면 수많은 피아니스트와 세계 유수 악단, 지휘자의 앨범이 검색된다. 그중 언제나 가장 첫 번째로 만나게 되는 음반은 세계적인 클래식 레이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나온 크리스티안 지메르만과 지휘 거장 레너드 번스타인이 빈필하모닉을 지휘한 1993년 버전이다. CD가 아닌 음원으로 클래식 세계를 탐험하는 클린이(클래식 어린이)들의 입덕곡이 될 수도 있는 중요한 자리를 선점한 음반이다. 한국에서 이 곡을 라이브로 듣는다는 것은 다시 없을 청각 경험이다.



에사페카 살로넨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한국을 찾은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마스트미디어 제공]


새하얀 재킷을 입은 뉴욕필 단원들이 자리에 앉자, 검은색 연미복 차림의 지메르만과 검은 상하의를 입은 살로넨 지휘자가 등장했다. 백조들을 이끄는 우아한 카리스마의 흑조처럼 두 사람은 무대에 올라 오랜만에 호흡을 맞췄다. 한국에서 살로넨과 지메르만의 호연을 보는 것은 2018년 이후 7년 만이다. 당시 살로넨이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가 지메르만과 함께했다.
지메르만은 여유가 넘쳤고, 유독 편안해 보였다. 리사이틀에서 간간이 보이는 날카로운 모습은 없었다. 인생에서 무수히 많이 연주했을 이 곡을 마주하며 지메르만은 오랜 친구와 함께 한 무대에선 칼날 같은 예민함을 내려놨다.
고요한 공연장에 울려 퍼진 피아노 독주의 시작부터 이전의 그와는 달랐다. 한없이 차갑고 투명하기 그지없었던 터치는 가볍지만 온화함이 더해졌다. 예나 지금이나 선명한 색채를 품은 덕분에 예술의전당의 객석 뒷쪽까지도 피아니시모의 음표들이 또렷하게 전달됐다.
연주 내내 거장의 여유로움이 곳곳에서 포착됐다. 그는 연주를 멈출 땐 뉴욕필 단원들과 절친 살로넨이 만들어내는 음악을 귀담아들었다. 1악장 74마디부터 다시 나오는 독주 이후엔 경쾌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피아노 안쪽으로 펼쳐둔 악보 한 장을 가쁜하게 넘겼다. 굳이 악보로 시선이 향하진 않았지만 지메르만이 악보를 넘기는 모습은 마치 지휘자의 지휘동작처럼 우아했다. 그것을 보는 것조차 관전 포인트였다. 지메르만은 곡 사이사이로 살로넨과 얼굴을 마주하고 눈빛을 주고받기도 했고, 간혹 지휘자처럼 선율의 흐름을 손에 맡기기도 했다.
면도날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던 완벽주의자 지메르만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30여년 전 녹음된 음반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었다. 음색은 물론 음악의 서사 역시 미묘한 변화가 곳곳에서 포착됐다. 1악장 카덴차에선 템포의 마법사처럼 악보와 악보 너머를 오갔고, 2, 3악장에선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연주가 이어지는 동안 의도적으로 휴지(休止)를 주거나 터치를 단순화해 간결한 음악을 만든 것도 그가 원하는 위치로 음량과 박자를 가져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빈틈없이 꽉꽉 채워진 연주의 정석이었고, 치밀하면서도 화려함을 품었던 그의 음악은 수백수천의 연주 뒤에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들렸다. 완벽하게 구축했던 세계를 허물고 다시 지은 음악 안엔 포용과 이해가 담겼다. 날이 바짝 서 몸서리 처질 만큼 시리고 차가운 젊은 지메르만도, 온기로 가득 채워 과장하지 않은 절제된 음악과 그 안에서 자유로운 형식을 찾아 넣은 황혼의 지메르만도 청중에겐 모두가 호사였다. 음악의 이야기와 방향성은 달라졌을지라도 지메르만은 여전히 음표를 지배하는 색채의 마법사였다.



핀란드 출신의 지휘 거장 에사페카 살로넨 [마스트미디어 제공]


연주를 마친 뒤 지메르만은 세 번의 커튼콜로 관객 앞에 섰다. 그는 다른 어떤 공연보다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인사를 할 때마다 내내 살로넨을 찾았다. 특히 두 번째 커튼콜에 나왔을 땐 무대 중앙까지 오지 않고, 살로넨을 계속 불러냈다. 통상 협연자에게 관객의 박수와 찬사를 돌려주던 무대 위 관례는 없었다. 지메르만은 살로넨과 함께 인사한 뒤 얼른 단원들을 지목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지메르만 역시 가장 앞자리에 자리한 뉴욕필 단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포옹하고 장난도 치며 오랜만의 공연이 남긴 기쁨을 만끽했다. 앙코르는 없었다. 살로넨과 어깨동무를 하며 기분 좋은 미소를 띈 인자한 지메르만이 무대 위 마지막 모습이었다. 대신 그는 2부에서도 공연장을 떠나지 않고 객석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심지어 공연장을 돌아다닌 모습까지 포착돼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역사적 협연을 마친 이후 살로넨과 뉴욕 필하모닉은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의 무대로 2부를 이어갔다. ‘영웅’은 베토벤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위해 만들었다가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 소식을 듣고 실망해 표지를 찢어버린 곡이다. 1, 2악장까진 웅장하고 폭발적인 사운드를 뿜어내진 않았지만, 뉴욕필은 산뜻하고 세련된 ‘영웅’의 면모를 보여줬다. 세계의 중심이자 모든 것이 거대한 미국, 메트로폴리스의 교향악 사운드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롭고 과장되지 않은 표현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저음의 더블베이스, 고음의 바이올린, 그 사이의 빈틈을 메우는 목관악기의 선율이 서사를 쌓았고,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듯한 관악기까지 더해지자 음악은 오묘한 매력을 입었다.
압권은 3악장이었다. 록 스피릿을 입은 뉴욕필은 그간 꾹꾹 눌렀던 불길이 치솟아 오르듯 모든 것을 쏟아냈다. 신중하지만 격렬했고, 그러면서도 흔들림 없는 음악은 살로넨의 정교하고 우아한 음악적 의도 덕분이었다. 이날의 앙코르는 바흐의 ‘당신이 내 곁에 있다면’(Bist du bei mir)과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중 ‘피날레’(Finale)였다.
최근 클래식 공연장에서 매주 톱스타들의 얼굴을 만나게 된다. 조성진의 리사이틀엔 방탄소년단 뷔와 박찬욱 감독이 함께 찾았고, 임윤찬과 클라우스 메켈레가 지휘한 파리 오케스트라 공연엔 배우 차은우가 찾았다. 이날 공연엔 배우 박보검이 찾았다. 이번 한국 공연에 객원 단원으로 참여한 뉴욕시티발레의 derek Ratzenboeck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박보검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린 뒤 “진정한 한국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